보통 주말에는 잘 그러지 않는데 웬일인지 잠에서 일찍 깼다.
창문 너머 공사하는 소리 때문일 수도 있고 옆에서 부산 떠는 다른 단원들의 꼼지락거리는 소리 때문일 수도 있고.
이왕 일어난 거 뭐하지 하는 생각에 거실로 나갔다가 책장에서 시간을 때울만한 책을 뒤지다가 발견했다.
그냥 소설을 읽은 지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문학에 문외한인 나에게 은희경이 누구인지 이 책은 어떤 책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에
일단 읽기 시작했다.
사실 그렇게 딱하고 이해가 되는 소설은 아니다. 꿈이니 안개니 하는 종류처럼 아리송하고 몽환적인 그런 내용이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의미가 문구가 와 닿는 것은 아마 공감하기 때문일테지.
사랑도 힘들고 인생도 쉽지 않고 꿈 꾸는 것조차 쉽지 않는 요즘 적절하게 잘 골랐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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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미있는 혹은 색다른 상상
49p
취한 밤이란 것은 어쩌면 내가 의식적으로 살아주지 않아도 살아지는 삶, 그러니까 여분의 인생이거나 혹은 시계로 잴 수 없는 또다른 차원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취해서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은 그 사람의 인생에 속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게 아닐까 그런 다음 어딘가 다른 곳의 시간에 가서 쌓이는 거다.
(정말 내가 취한 시간들이 다른 곳에 가서 쌓인 다면 아마 난 꽤나 많은 시간을 저축해 놓았을텐데 -)
50p
과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치 물의 여행처럼. 비든 땅에 스민 지하수든 사람 목속의 물이든 오줌이든 혹은 주전자 속의 끓는 물이든 수증기든 다시 구름이고 비든 간에 – 모습만 바뀔 뿐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그뿐일까. 만약 진과 내가 김밥을 사갖고 자동차에 탔다고 하자. 나의 낡은 자동차는 가뜩이나 우리가 무거워서 불만인데 김밥 때문에 더 무겁다고 투덜댄다. 미안해진 우리는 김밥 무게라도 덜어주기로 마음먹고 차 안에서 김밥을 다 먹어치울 수도 있다. 그래도 자동차는 불만이다. 자동차는 과학을 앞세운다. 질량불변의 법치 따위를 갖다대며 자동차 안에 있던 것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동차의 입장이다. 진과 나로서는 김밥을 먹기 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자동차처럼 생각하려는 걸까. 한번 존재한 것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얼마 전 오려두기를 했다가 잘못해서 날려버린 진의 컴퓨터 파일은 어디에 존재해 있다는 걸까.
(재밌는 생각이라고 느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말이야-)
60p
흉터는 그 사람이 살면서 겪어온 사건의 흔적이다. 스쳐갔던 상처들이 몸에 새겨져서 그때의 아픔과 시간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흉터들을 다 합해 수식을 만든다면 그 흉터를 지닌 사람의 인생이 값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112p
꿈은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만들어진, 이곳 인생을 변형시킨 부수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였다.
128p
제한된 삶 속에서 인간이란 죽을 때까지 전체를 다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하나를 전체로 알고 사는 편이 여러 개를 알고 난 뒤 나머지에 대한 갈급 때문에 조급해하며 살아가는 쪽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더 나쁜 경우로는 일부라는 점에서 결국 하나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여러 개를 알았다고 해서, 마치 전체를 알고 있는 듯이 착각하는 경우이다. 어쨌든 지금은 몇 권의 책을 두고두고 읽는 것과 수없이 많은 책을 읽어대는 사람의 방법 사이에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말이다.
150p
인생이란 택시 잡기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택시가 잡히고 안 잡히고는 전적으로 운이겠지. 둘 중 하나잖아. 어떻게 보면 확률이란 성립이 안 돼. 잡힐 확률이 구십구 퍼센트라고 하더라도 하필이면 내가 일 퍼센트에 속해서 택시를 못 잡을 수도 있는 문제니까. 그런 줄 알면서도 택시가 잘 잡힐 만한 곳을 조사하고 통계를 내고, 또 그 정보를 알아내고 그 정보가 지시하는 위치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인생이겠지. 정작 택시가 잡히고 안 잡히괴는 운에 따라 결정되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잖아. 세상은 무위를 용납하지 않으니까.
(난 한상 택시가 잡히지 않는 쪽이었지.)
199p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곡을 감상한다기보다 단지 바깥과 차단된 나 혼자의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되기도 했다. 여럿 속세어 혼자가 되는 방법이랄까.
(요즘 스마트 폰을 보고 있으면 이런 말에 깊히 공감할 수 있겠더라. 뭐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213p
꿈을 꾸지 않게 되면 떨어질 곳도 날아오를 곳도 없어진다. 누군가는 위에서 걷도 또 누군가는 아래에서 걷겠지만 어쨌든 그 때부터 반복되는 시간의 평지를 걷는다는 점은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걷다보면 죽음과 만난다.
2. 얼마 전
55p
저는 슬픔을 잘 견디지 못해요. 사람들은 모두 다 슬픔을 잘 참는 것 같아요. 어떻게 그처럼 슬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죠? 슬퍼도 일을 하고 먹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그러다보면 슬픔이 사라지기도 한다면서요? 담임수녀님은 기도를 하면 슬픔이 사라진다고 말하곤 했지요. 하지만 저는 잘 안 됐어요. 당신은 어떻게 해요? 당신도 슬플 때는 울겠지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 사람이 떠올랐다. 먼가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잘 참았고 그 친구는 잘 표현했고...)
97p
누군가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하는 것? 서로 아무런 법적 사회적 친분도 맺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실제 자기가 살아가는 삶과는 아무 상관 없이? 진이 이죽거렸다. 그런데도 그 감정을 지속하고 싶은 열정이 생겨난단 말야? 이봐,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나고 싶어해. 왠 줄 알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되질 않거든. 만나서 그 사실을 자꾸 확인하고 또 표현하고 싶어지는 게 사랑이라구. 그런 식의 확인과 표현에 유용하게 쓰이는 게 바로 육체이고 말야. 육체를 통해서 자기의 사랑을 제대로 표현한 것, 그걸 오르가슴이라고 하는 거야. 제1성기는 '뇌'잖아. 존재만 알면 사랑이 가능하다구? 그렇게 정신만 갖고 장난치는 고급 인간이 정신병자 빼고 또 있어?
117p
물소리는 지금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걸 알려줘요. 행복한 순간에는 그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슬퍼져요.
194p
많은 사람이 사랑이 있다고 믿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이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것은 부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욕망의 원식 속에 있어요. 어떤 사람이 일 킬로그램의 금을 가진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해봐요. 그것은 가능해요. 그러나 일 킬로그램의 금을 얻은 사람은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에요. 그가 원하는 금의 양은 한계가 없이 계속 늘어나요. 그러므로 그가 부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죠.
사랑을 믿지 않을 때는 사랑이 가능해요. 왜냐하면 그 단계에 서는 일 킬로그램 정도의 사랑을 원하니까요. 그러나 일 킬로그램을 얻은 다음의 갈망은 더욱 강렬해져요.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오직 하나이고 또 영원한 사랑까지를 원하기 마련이죠. 그때부터 사랑이 불가능해지는 것이구요.
사랑이 있다고 믿는 순간 사랑이 사라져요.
129p
그러나 나는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지 않는 데에 억울함을 느끼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어떤 것이 행복인지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고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수시로 점검하는 체크 리스트로도 또 센서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 같다. 행복하다고 느끼고 싶어하므로 그들은 끊임없이 행복의 의미를 창안해낸다. 작은 것이 행복이다 혹은 큰 것이 행복이다, 고독이 행복이다 아니다, 행복은 있다 없다 – 왜 늘 행복에 대해 자의식이나 예민함을 동원하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행복이 자기의 부모나 내무반장이나 애인도 아닌데 왜 그렇게 떠받들고 쩔쩔매는지 알 수 없었다. 행복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동안 행복에 관계없이 행복에 관한 의미 규정만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