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를 휴학하고 여행을 다니던 시절 다른 여행자의 손을 거친 "우리는 사랑일까" 라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었다. 무언가 평범하지 않은 글쓰기 방식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 후에는 그의 표현 방식에 묘하게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의 기술'도 읽고, '불안'도 읽고 뭐 그랬지. 그런 그의 데뷔작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사실 처음은 아니다. 대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형의 추천으로 읽으려고 손에 들었다가 그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금방 포기하고 말았는데 돌고 돌아 다시 손에 쥐게 되었다. 읽게 될 책이었나 보다.
2.
'우리는 사랑일까'를 읽으며 '연애'에 대해서 너무나 공감하게 만드는 그의 번득이는 해석에 그 당시 이역만리에 떨어져 원거리 연애를 하던 친구가 많이 떠올랐었다. 과거형이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재차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으니. 연애를 하면서 즐거웠고 그리고 때로는 답답하고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해 미쳐 정리가 되지 않던 것들이 그의 해석으로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그런 느낌이었다. '연애'를 책으로 배워서 다시 보면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부푼 꿈을 꾸기도 했었는데......
'연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책으로 배웠다. 많지는 않지만 몇 번의 연애를 더 하면서 반복되었던 상황, 감정 혹은 상처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의 주석이 공감이 된다.
3.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이다.
특히 혼자 하는 것이 아닌 둘이 해야하는 '연애', '사랑'은 더 어려운 것 같고 어려웠던 것 같다.
여전히 '연애'도 잼뱅인 나에게 책이 위안인가.
4. 본문 중
1.
클로이와 내가 옆자리에 앉을 확률처럼 작을 경우일 때,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때, 적어도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을 운명 이외의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16쪽) 이렇게 싹트기 시작한 마음은 곧 욕망 때문에 나는 실마리들을 악착같이 쫓는 사냥꾼이 되었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33쪽) 따라서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다. (48쪽)
2.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몸을 철저한 프라이버시의 영역으로 간직하던 여자가 이제 내 앞에서 옷을 벗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53쪽) 이런 침실에서는 육체가 두드러지고 또 그만큼 상처받기도 쉽기 때문에, 정신은 말없이, 개입 없이 판단을 내리는 도구가 된다. (55쪽) 따라서 침실에서는 연인들의 생각의 소리를 삼켜버리는 숨소리, "나는 정열에 사로잡혀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라는 메시지를 확인해주는 숨소리만 들린다. 나는 키스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둘러싼 공식적 신화이다. (56쪽)
3.
이렇게 사랑이 시작되면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각ㄴ에 빛이 바랠 수 있다는 것이다. (59쪽)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66쪽) 그래서 16세기의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 밖에 없다." (71쪽) 이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가 중요하다.
4.
우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74쪽) 그래서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78쪽)
5.
본격적인 사랑 앞에 새로운 문제가 있다. 클로이와 나는 둘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상당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밤에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가 각기 다른 데서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결국 다른 책이었던 셈이다. (109쪽)
6.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은 몸뿐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홀린 연인은 영혼 역시 그 껍질과 똑같기를 바라게 된다. 몸이 거기에 어울리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를, 살갖히 표현하는 것이 속에 든 본질이기를 바라게 된다. (124쪽) 그 자신에게 그런 믿음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오아시스 콤플렉스랄까? (125쪽)
7.
이러한 오아시스 콤플렉스에 의해 발생한 간극을 매꾸는 것은 공유된 경험이라는 기초 위에서 자라난 친밀성이다. (138쪽) 그리고 더 나아가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143쪽)
8.
이런 사랑도 동요의 시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61쪽) 그리고 전 애인들의 존재는 이러한 동요의 실체를 확인시키기도 한다. 그 여자 친구는 나의 내부에 있는, 또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클로이게도 있는 변심, 그러나 내가 직면할 용기가 없는 변심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173쪽)
9.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하여 얻은 행복, 이성적으로 노력해서 어떤 일들을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행복은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내가 클로이와 함께 얻은 행복은 깊은 철학적 숙고 뒤에 나온 것도 아니고 개인적 성취의 결과도 아니었다. 단지 신의 기적적 개입에 의하여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귀중한 사람들 찾아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그런 행복은 위엄했다. (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