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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달 너머로 달리는 말_김훈

by ayubowan 2020. 8. 10.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파람북 20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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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김훈의 신작이라서 주문했다. 다른 의도는 없다.

 

김훈의 판타지 소설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처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거나 [공터에서]처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주인공을 등장시켰던 전작들과 달리 신화적 상상력에 기반한 소설이다. 또한 동물인 말(馬)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데, 소설 [개]에서 저잣거리 개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적이 있어서 동물을 화자로 설정한 것이 처음있는 시도는 아니다. 

 

말(馬) 등에 처음 올라탄 무렵 그리고 그 이후 나하 강 주변 두 나라에 대한 이야기

소설의 시작이 흥미롭다. 처음 말 등에 올라탄 사람이라니. 사람은 언제 어떻게 말을 타게 되었을까, 개는 언제부터 사람과 친구가 되었을까 같은 것들이 문득 궁금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궁금증을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구나 싶다. 단편적 상상에 그칠 수도 있는데, 한 권의 소설로 상상속 세계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달까. (나도 말랑말랑한 사고로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헛생각을 잠깐 해봤다.)

 

소설은 말 등에 처음 올라탄 인간인 [추]와 그의 딸 [요]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나하 강 주변 두 나라인 [초]와 [단]의 부족민들이 말을 타고 다니며 써내려간 역사와 그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인 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짧고 힘있는 문장은 신화 속 이야기에 흡입력을 더한다. 더욱이 [초]나라와 [단]나라 사람의 시선에서 [신월마]와 [비혈마]의 시선으로 시선을 바꾸어가며 전재되는 이야기가 속도감있다.

 

서물(書物) 만들고 돌무더기를 쌓아 정주하여 게을러지기를 경계한 [초]와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고 성을 쌓아 역사를 기록하는 [단]의 싸움과 두 가치의 충돌 속에서 죽어나는 사람과 말, 그리고 전투 속에서 맺어지고 끊어지는 인연의 이야기는 책을 덮은 후에도 여운이 남는다.

 

덧, 책에 소개된 나하 강 유역의 지도를 보는데, 얼핏 한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s://images.app.goo.gl/enNVtbHyB2RYyt4g6

 

이런저런 문구들

초의 선왕들은 기록된 서물로 세상을 배우지 못하도록 엄히 단속했다. 칼이나 활을 쓰는 법, 말을 타고 낙타를 모는 방법을 문자로 기록해 놓으면, 어리석은 자들이 곳간에 고기가 쟁여 있는 줄 알고 더 이상 익히려 하지 않아서, 몸은 나른해지고 마음은 헛것에 들떠, 건더기가 빠져나간 세상은 휑하니 비게 되고 그 위에 말의 껍데기가 쌓여 가랑잎처럼 불려가니, 인간의 총기는 시들고 세상은 다리 힘이 빠져서 주저 앉는 것이라고 목왕은 말했다. (18쪽)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적을 베지 못하면 내가 죽을 차례다. 칼이 적 앞에서 헛돌았을 때 나의 전 방위는 적의 공세 앞에 노출된다. 이때 수세를 회복하지 못하면 적의 창이 내 몸에 꽂힌다. 나의 공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고 적의 수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다. 적 또한 이와 같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생사는 명멸한다. 휘두름은 돌이킬 수 없고 물러줄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다. 모든 휘두름은 닥쳐오는 휘두름 앞에서 덧없다. 수와 공은 다르지 않고 공과 수는 서로를 포함하면서 어긋난다. 모든 수는 죽음과 삶 사이를 가른다. 그러므로 공에서 수로, 수에서 공으로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23쪽) 지금까지 전투 혹은 전쟁에 대해 이런 묘사는 보지 못했다. "적을 베지 못하면 내가 죽을 차례"라는 말이 어떤 전쟁 영화보다 더 사실적으로 섬득하게 다가온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나 세상에는 없는 것들을 세상의 땅 위에 세우려고 단은 싸우고 또 싸웠다. 단은 글자로 가지런히 드러나는 것들을 귀하게 여겼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고, 그것들이 이루어지기각 더딤을 한탄하면서 많은 문장을 지었다. (32쪽)

 

말에 올라타서, 추는 시간을 앞질러, 시간을 이끌면서 달렸다. 말의 무게와 사람의 무게가 말의 힘에 실려서 무거움이 가벼움으로 바뀌었다. 말을 타고 달릴 때, 새로운 시간의 초원이 추의 들숨에 빨려서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초원은 다가왔고 다가온 만큼 멀어져서 초원은 흘러갔다 (57쪽)

 

말(言)이란 개 떼와 같구나. 풀어놓아서 마구 날뛰어야 힘이 생긴다. 말은 말(馬)로 막지 못한다. 개로도 막지 못한다. (218쪽)

 

초원의 봄은 땅속에서 번져 나왔다. 봄에 초원은 벌렁거렸다. 눈이 녹아서 부푼 흙 속에서 풀싹이 돋아나고 벌레들이 깨어났다. 벌레들은 땅속에서 올라오고 숲에서 살아났다. (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