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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_박준

by ayubowan 2020. 8. 11.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리커버 에디션
국내도서
저자 : 박준
출판 : 난다 201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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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일과 시간에는 해야할 업무에 짖눌리고, 퇴근 이후에는 인터넷 뉴스와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생각]없이 몇 달이 흘렀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집에 있는 말랑말랑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뜻밖의 위로와 공감

최근에 위로 혹은 공감이라는 주제로 일상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서점에 즐비하다. 파스텔 톤의 책 표지와 따뜻한 분위기의 일러스트, 그리고 짧은 텍스트들이 어우러진 책들이다. 나는 이럴 때 힘들었다, 이런 느낌을 받았다 하고 저자가 던져주는 메시지를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위로와 공감을 강요하는 것 같아 오히려 조금 불편해서 잘 읽지 않게 됐다. 시작과 끝, 본론이 있거나, 가상의 인물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통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한 권의 책에 조금 더 흥미가 있기도 했고. 그런 약간의 취향 혹은 일종의 편견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책을 끝까지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의 첫 번째 시가 주는 뜻밖의 위로 덕분이다. '아, 나만 힘들지 않구나', '맞아 이런 기분이었어' 라고 온전히 공감하게 되는 시 덕분에 마음으 몽글해졌고, 저자와 책의 다음 내용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다 읽었다. 완독의 공은 온전히 첫 번째 시 [그늘] 덕분이다.

 

[그늘]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11쪽)

 

30대

글에서 이야기 사이사이에서 문득문득 80년대생의 감성이 느껴져서 혹시나 하고 찾아봤는데, 나이가 나와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책의 저자 박준은 등단 시인으로 1983년 생이다. 나이를 확인하고 나니 글이 주는 위로와 공감의 크기도 커졌다. 저자의 배경이 이야기에 힘을 더하기도 하는구나.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고 살아야 하지만 그 속에서 찾아오는 고독과 마주하고, 지나온 시간도 적지 않고 남은 시간도 적지 않아 그 사이에서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부모님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하게 되기도 하는 30대의 나를 잘 대변해주는 글들이 뜻밖의 위로와 공감을 전해준다.

 

일에 생활에 치이던 나에게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책이었다.

 

이런저런 문구들

 

[낮술]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63쪽)

 

[해남에서 온 편지]

 

배추는 먼저 올려보냈어.

겨울 지나면 너 한번 내려와라.

내가 줄 것은 없고

만나면 한번 안아줄게. (69쪽)

 

[절]

 

배가 고플 때 먹고, 고단할 때 몸을 뉘이고, 졸음이 오면 애써 쫓아내지 않고 잠이 드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간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해탈과 가장 가까이 자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렇게 참지 않는다면 조금 덜 욕망할 수 있을 테니까. (120-121쪽)

 

[어른이 된다는 것]

 

그동안 살면서 나이를 묻는 질문을 숱하게 들어왔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주로 나보다 더 연장자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나에게 나이를 물은 뒤 부러움과 핀잔이 반반쯤 섞인 말들을 건넸다.

"내가 그 나이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한창 좋을 때다"나 "조금 지나봐야 알지" 같은 말들을 거쳐 "그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로 끝을 맺곤 하는 말들.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던, 이해는 가지만 딱히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던 말들.

어느 모임의 저녁 자리에서 연세가 지긋한 한 분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시작은 역시 같은 질문이었다. 하자민 돌아오는 그분의 말은 달랐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아니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147-148쪽)

 

[고아]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157쪽)